역사 속 특정 날짜에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9월 22일 역시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국제 질서를 뒤흔들고 인류의 비극적 전환점을 남긴 날로 기록됩니다. 오늘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과 1931년 만주사변의 본격화라는 두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1. 1980년 9월 22일,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전쟁의 배경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중동의 정치 판도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혁명 직후의 혼란을 기회로 삼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국경 문제와 석유 자원 확보, 그리고 걸프 지역 주도권을 노리고 이란을 침공했습니다.
전격적인 침공과 장기전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군은 공습과 지상군을 동시에 투입해 이란 영토 깊숙이 진격했습니다. 단기 승리를 예상했던 이라크의 계산은 빗나갔습니다. 혁명 직후 불안정하던 이란은 종교적 결집과 애국심으로 맞서 싸웠고, 전쟁은 무려 8년간 이어지는 소모전으로 변했습니다.
막대한 피해와 국제적 파장
이 전쟁은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양국의 석유 시설과 도시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라크는 화학 무기를 사용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걸프 지역 전체의 안보 불안이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석유 공급 불안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며 세계 경제에도 충격을 주었습니다.
전쟁의 의의
이란-이라크 전쟁은 단순한 국경 분쟁을 넘어 냉전 체제와 중동 석유 패권이 얽힌 국제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두 나라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훗날 걸프전과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불안정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
2. 1931년 9월 22일, 만주사변의 본격화
사건의 발단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중국 선양 인근의 남만주철도를 폭파한 뒤 이를 중국군의 공격으로 조작했습니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군은 만주 전역을 침공하기 시작했고, 불과 며칠 뒤인 9월 22일에는 국제 사회가 이를 심각한 침략 행위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침략과 만주국 수립
일본군은 단기간에 만주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이후 괴뢰국 만주국을 세워 침략을 합법화하려 했습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이를 ‘자위적 행동’이라고 선전했지만, 세계는 이를 명백한 침략으로 규정했습니다.
국제 사회의 반응
국제연맹은 1932년 리튼 조사단을 파견해 일본의 침략임을 공식화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조사 결과를 거부하고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습니다. 이는 국제연맹의 무력함을 드러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만주사변의 의미
만주사변은 일본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륙 침략에 나선 출발점이었습니다. 중국과 한반도는 일본의 전쟁 자원 공급지로 전락했고, 아시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 질서의 한계를 드러낸 동시에, 전쟁 방지 기구의 무력함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됩니다.